장애인복지정책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장애인 부모 및 보호자를 위한 지원도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장애아동 부모를 위한 지원 시스템이 여전히 미흡한 상황이다. 필자는 이번 연재 칼럼(총 3부)에서 ‘쉼‘에 초점을 둔 독일의 ‘부모-자녀 요양제도‘를 중심으로, 장애아동 부모의 '쉼'에 대한 당위성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에서 내담자에게 쉬어야 한다, 아이도 어른도 쉬고 충전해야 한다고 상담하면, 그걸 누가 모르냐며 정색하거나 저를 비난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몇 주 전, 한국에서 20년 넘게 심리상담가로 활동 중인 A 씨가 내게 한 말이다. A 씨는 여러 차례 장애인 부모들도 상담하며 "쉬세요", "잠시 멈추세요“, "재충전하세요"라고 강조하지만 이러한 말이 현장에서는 전혀 효과가 없다며, 그동안의 직업적 어려움과 답답함 그리고 막막함을 토로했다.

20년 넘게 한국에 살았던 나는 '쉼'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제는 20년 가까이 독일에 살다 보니, '쉼'에 대한 독일인과 한국인의 태도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쉼 없는' 대한민국

"쉬세요"라는 말이 한국인에게 아직도 와닿지 않는 이유는, 쉼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정작 현실에서는 숨 고르기도 벅찬 사회변화속도ㆍ근로조건ㆍ교육환경ㆍ가정환경 속에 처해 있기 때문일 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가 초래한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쉬는 법을 모르는 듯 하다.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도 자기개발, 스펙쌓기, 대학입시준비 등의 차원에서 또 분주하게 무언가를 한다. 쉰답시고 소문난 맛집과 유명 관광지를 찾아 돌아다니지만, 이것은 진정한 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어른들은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일하고 사회 생활하고 자녀를 키운다. 아동ㆍ청소년들은 이러한 어른들을 바라보며 성장한다. 어린 세대가 충분히 쉬는 법을 배우거나 터득할 리 만무하다. 

'쉼'은 인권이다. ©unsplash
   '쉼'은 인권이다. ©unsplash

'쉼'은 인권이다

독일에서 '쉼'은 인간으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 즉 인권 차원에서 정의되고 인정되고 실현된다. 이러한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ㆍ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고, 이러한 제도가 '당연하게' 실현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문화를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개인의 인식이 정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연차유급휴가(약 30일)를 당당하게 다 쓰는 것이 독일에서는 정상이다. 칼출근ㆍ칼퇴근하는 것도 정상이고, 육아휴직 후 직장에 복귀하는 것도 정상이며, 직장인이 조금만 아파도 당당하게 병가를 내는 것이 독일에서는 정상이다.

한마디로 '쉼'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바로 멈추고, 휴가를 보내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치료와 재활을 받으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제도적ㆍ문화적ㆍ인식적 기반이 단단히 다져진 나라가 독일이다. 바로 이러한 기반 위에서 장애인복지정책도 실현되는 것이다. 

'쉼'은 가족을 건강하게 만든다. ©unsplash
'쉼'은 가족을 건강하게 만든다. ©unsplash

'쉼'은 가족을 건강하게 만든다

20년 가까이 독일에 거주하며 수많은 장애인 가족을 만나본 나는 '쉼'과 관련해 독일 가족과 한국 가족의 커다란 차이점을 하나 발견했다.

독일의 장애인 가족은 (비장애인 가족과 마찬가지로) 일 년에 수차례 휴가를 떠난다. 학령기 장애인을 둔 가족은 방학기간에 무조건 휴가를 떠난다. 1~2주일 정도 산으로 바다로 해외로 휴가를 떠난다. 성인 장애인을 둔 가족은 일 년에 30일 정도 되는 연차를 잘 분배해서 정규적으로 휴가를 떠난다. 역시나 1~2주일 정도 산으로 바다로 해외로 휴가를 떠난다. 이것은 독일의 전형적인 휴가 문화이기도 하다. 

중증장애인을 둔 가족도 최대한 자주 휴가를 떠나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어 내 친구 카트린은 중도중복장애가 있는 딸(8살)과 비장애인 아들(12살)이 있다. 카트린 식구는 매년 봄 방학에는 독일 내 여행을 하고, 여름방학에는 휠체어 타는 딸을 위해 특별 개조된 캠핑카를 대여해 해외 여행을 하며, 겨울방학에는 스위스로 넘어가 가족 스키를 즐긴다. 매번 휴가를 다녀온 후 카트린은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말한다.

"이제 다시 에너지 충전했어!" 

장애인 가족이 이토록 자주 휴가를 떠나는 이유는 애초부터 시간적ㆍ금전적 여유가 많아서가 아니다. 물론 국가의 든든한 지원정책 및 복지정책도 한 몫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쉬기 위해 시간을 일부러 또는 억지로 만들고, 쉬기 위해 돈을 열심히 또는 악착같이 모은다. 

삶에서 쉴 수 있는 여유와 기회가 훨씬 많은 독일의 장애인 가족은, 단 며칠간의 휴가 조차 떠나기 힘든 한국의 장애인 가족보다 훨씬 편안하고 안정되어 보이고 훨씬 건강해 보인다.

'쉼'은 회복탄력성의 핵심이다. © unsplash
'쉼'은 회복탄력성의 핵심이다. © unsplash

'쉼'은 회복탄력성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강'은 내면의 건강이다. 내면이 건강한 사람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회복탄력성(resilience)', 즉 시련과 실패를 통해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능력이 높은 사람이기도 하다. 

어느 독일 심리학자가 강조한 말이 생각난다.

"회복탄력성의 핵심은 인내력이 아니라 쉼과 재충전입니다."

회복탄력성의 핵심은 다시 일어나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잠시 멈추고 충분히 쉬고 그러고 나서 다시 일어나는 데 있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중간중간에 쉬고 재충전하기 때문에 건강하다. 

부모가 아프면 자녀도 아프다

물론 독일 부모라고 해서 모두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독일 건강보험공단(AOK)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독일 부모 중 약 3분의 1이 높은 심적 부담 및 고충을 안고 있다. 자녀가 장애가 있을 경우 부모의 심적 고충이 비장애인 부모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증명된 바이다.   

부모의 과도한 심적 부담 및 스트레스는 부모-자녀 유대감 형성과 자녀 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부모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자녀는 죄책감과 외로움, 고립감에 휩싸인 채 불안한 성장기를 보낼 확률이 높다. 

이제는 장애아동 부모가 쉬어야 할 때다. © unsplash
이제는 장애아동 부모가 쉬어야 할 때다. © unsplash

이제는 장애아동 부모가 쉬어야 할 때

장애자녀의 고된 육아 및 돌봄으로 지칠 대로 지친 부모들에게 독일 상담가들은 무슨 말을 건낼까? 그들은 대부분 "쉬세요“,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세요"라고 조언한다. 

심신이 지친 부모를 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우선 부모를 쉬게 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공기 좋고 풍경 좋은 휴양지에서 푹 쉬면서 전문 치료(예를 들어 부모에게 필요한 물리치료, 심리치료)를 받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혼자가 안 된다면 자녀를 동반하되, 전문인력이 자녀를 돌봐 주는 가운데 부모가 온전히 자기 자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어떨까?

그것도 며칠이 아닌 몇 주 동안, 만약 직장인이라면 이 기간을 유급 휴가로 인정하여 푹 쉬도록 해주는 것은 어떨까?

게다가 이 모든 게 무료 서비스라면 어떨까?

내가 헛된 꿈을 꾸는 것일까? 아니다!

독일에는 바로 이러한 휴가 같으면서도 휴가가 아닌 요양 프로그램이 있다. 자녀가 아닌 부모에게 초점이 맞춰진 가족지원제도이다. 장애자녀의 부모뿐만 아니라, 자녀양육에 어려움이 많은 사람, 가정불화, 배우자 사별, 이혼, 과체중이나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심신이 지친 부모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요양 프로그램이 있다. 이를 ‘부모-자녀 요양(Eltern-Kind-Kur)‘이라고 한다. (다음 편에 계속)


※기사원문-에이블뉴스(https://www.ablenews.co.kr/news/articleView.html? idxno=212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