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어가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언어로 인정된 지 8년이 지났습니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수어를 얼마나 받아들였을까요?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이 만들어지고 2020년 ‘한국수어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됐지만, 현실에서 수어는 여전히 외면받는 언어입니다. 수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농인들은 청인(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늘 제한된 정보만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는 3일 제4회 한국수어의 날을 맞아 농인들이 처한 현실을 짚고 자기 언어가 있음에도 숨죽여야 했던 이들의 고충을 들었습니다.

농인들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지만 마치 외국에 와 있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교육기관을 비롯해 관공서나 대형마트, 병원, 백화점, 시장, 카페, 식당 등 어디를 가든지 수어만으로 원활한 소통이 불가능해서다. 기본 권리는 이들에게 늘 반쪽으로 주어진다.

한국농아인협회 경상남도협회가 1일 경남도의회를 방문해 '농교육 정상화 촉구 대정부 건의안' 의결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박남용(국민의힘·창원7) 경남도의원이 대표 발의한 '한국수어를 중심으로 하는 농교육 정상화 촉구 대정부 건의안’은 이날 도의회에서 통과됐다. /경남도의회
한국농아인협회 경상남도협회가 1일 경남도의회를 방문해 '농교육 정상화 촉구 대정부 건의안' 의결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박남용(국민의힘·창원7) 경남도의원이 대표 발의한 '한국수어를 중심으로 하는 농교육 정상화 촉구 대정부 건의안’은 이날 도의회에서 통과됐다. /경남도의회

◇억울하고 아파도 숨죽이는 사람들 = 농인들은 일상에서 몸짓에 가까운 언어로 겨우 의사를 표현하거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통역사를 불러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갑자기 몸이 아프거나 교통사고 등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을 때다.

청각장애인 이윤숙(63·창원시 진해구) 씨는 운전 중 다른 차량과 접촉 사고를 당했던 순간이 선명하다. 정해진 차선을 따라 주행하던 그는 갑자기 옆 차선에서 넘어온 차량에 속수무책으로 부딪쳤다. 당연히 상대방 차량 운전자 과실이 큰 상황이라고 생각했지만 사고 직후 잘못을 인정하던 가해 차량 운전자는 이내 태도를 바꿔 이 씨 잘못으로 몰아갔다.

“당시 밤이었다 보니 주변에 차량도 없었습니다. 분명히 내 잘못이 아닌 상황이었지만 이러한 의사를 전달할 수 없어 당황했어요. 상대방은 저를 몰아붙이면서 화까지 냈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결국 그 자리에서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보험 처리 결과 상대방 측 과실이 인정돼 불이익을 받지 않았지만 이 같은 일은 농인에게 일상이다.

농인과 청인의 의사소통 문제는 단순히 수어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지는 않는다. 수어뿐만 아니라 농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농인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는 한글 자막만 있으면 괜찮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는 반만 맞는 이야기다. 농인이 쓰는 수어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같은 독립된 언어다. 즉 농인에게는 한국어가 외국어와 같다는 것이다.

청각장애인 박갑주(68·진해구) 씨도 “요즘 대부분 영상에 자막이 붙어 있는데, 솔직히 100% 이해하기 어렵다”며 “수어는 한국어 문장 구조와 다르기 때문에 순식간에 지나가는 자막을 읽고 뜻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결국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수어 통역이 필요한데 뉴스나 일부 방송을 제외하고는 제공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화면 한 귀퉁이에 작게 붙어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농아인협회 경상남도협회가 1일 경남도의회를 방문해 '농교육 정상화 촉구 대정부 건의안' 의결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박남용(국민의힘·창원7) 경남도의원이 대표 발의한 '한국수어를 중심으로 하는 농교육 정상화 촉구 대정부 건의안’은 이날 도의회에서 통과됐다. /경남도의회
한국농아인협회 경상남도협회가 1일 경남도의회를 방문해 '농교육 정상화 촉구 대정부 건의안' 의결 과정을 지켜보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박남용(국민의힘·창원7) 경남도의원이 대표 발의한 '한국수어를 중심으로 하는 농교육 정상화 촉구 대정부 건의안’은 이날 도의회에서 통과됐다.  /경남도의회

◇배울 기회 소거된 삶 = 29살 청각장애인 딸을 둔 정희선(48·진해구) 씨는 아이를 키우면서 청각장애인들이 겪는 고충을 간접적으로 이해했다. 특히 아이가 비장애인 아이들처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늘 답답함을 느꼈다.

“특수학교를 다녔는데 담임 선생님이 수어를 아예 모르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그냥 학교에서 눈만 끔뻑이다 오는 셈이지요. 학교에 매일 가기는 했지만 거기서 뭐를 배워오겠습니까.”

정 씨는 특히 아이 졸업식 날 본 광경을 아직도 기억한다. 특수학교인 만큼 다양한 장애 유형을 가진 학생들이 있었는데, 정 씨 딸을 비롯해 농인들도 10여 명 있었다. 하지만, 졸업식은 수어 통역사 없이 진행됐다. 정 씨는 이에 곧바로 학교 측에 항의했고 부랴부랴 통역사가 배치됐다.

“처음에 제가 항의하니까 학교 측에서 어차피 애들이 똑똑하지 않아서 뭐라고 하는지 말 모른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게 현실인 겁니다. 특수학교에서도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데 일반 학교라고 다를까요.”

정 씨는 농인 학생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려면 농인 교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농문화를 이해하고 학생들과 수어로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농인 교사가 있어야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남에는 농인 교사는커녕 농학교 조차 없다.

농학교는 전국 9개 시도(서울·부산·대구·인천·울산·경기·강원·충북·전북)에 총 13개교가 있는데 절반 이상인 7개교가 수도권에 있다.

결국 대부분 농인 학생들은 일반학교에 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2023년 기준 경남지역 청각장애인 학생 191명 가운데 특수학교에 다니는 이들은 7명에 불과했다. 65명이 특수학급, 119명이 일반학급에서 수업을 받았다.

은종군 한국농아인협회 기획실장은 “일반 학교에서 농인들이 수업을 받으면 기본적인 학습권 보장이 안 된다”며 “현실적으로 모든 수업에 수어통역사를 배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수어를 따로 가르쳐주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농인들도 똑같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는 만큼 농인들을 위한 특수학교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학교 설립이 안 된다면 최소한 일상에서 수어로 지원받을 수 있는 영역을 넓혀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신 기자


※기사원문-경남도민일보(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 idxno=9030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