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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인디고]-이용석의 잡썰- ‘신청주의’의 잔인성을 넘을 수 있을까?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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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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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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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상담가
동료상담가

[이용석의 잡썰] ‘신청주의’의 잔인성을 넘을 수 있을까?

복지는 권리인가, 시혜인가? 해묵은 질문에 대한 답을 이재명 대통령이 먼저 신청주의를 통해 권리임을 언급한 만큼 장애인정책의 전달체계가 전환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복지는 권리인가, 시혜인가? 해묵은 질문에 대한 답을 이재명 대통령이 먼저 신청주의를 통해 권리임을 언급한 만큼 장애인정책의 전달체계가 전환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 ChatGPT 이미지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장

복지는 권리인가, 시혜인가. 이 해묵은 질문 앞에서 우리나라의 제도는 명확한 답을 못한 채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다. 복지의 문턱에는 늘 ‘신청’이라는 장벽이 서 있기 때문일 텐데 ‘장애인 정책’은 이 장벽을 넘는 가장 냉혹한 시험장이 되어왔다. 신청주의란 제도를 알고, 병원 진단서 등 관공서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준비하고, 행정의 정해진 규율에 적합해야 비로소 권리를 얻는 방식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가장 가난하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이 높고 많은 허들 앞에 가장 먼저 주저앉곤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신청주의의 잔인성’을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국가는 ‘삶’을 보장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굶주린 국민이 찾아가 빈 밥그릇을 내밀 때에야 못내 밥그릇을 받아들 뿐이다. 그렇다고 당장에 밥그릇을 채워주는 것도 아니다. 빈 밥그릇을 채워줄지, 얼마나 줄지 여부를 다시 촘촘하게 심사한다. 하지만 이미 걸을 힘조차 없이 굶주려 있다면?

‘장애인 정책’의 거의 모든 길목에는 신청주의가 놓여 있다. 지원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장애가 있는지 여부를 먼저 판정받아 국가가 인증(?)하는 장애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난 후 판정받은 장애로 인해 일상생활이 얼마나 제약이 있는지를 다시 증명(?) 받아야 활동지원제도를 신청할 수 있으며, 장애로 인해 얼마나 빈곤한지를 구구하게 설명해야만 장애인연금 대상에 포함되는 식이다. 특수교육과 고용지원까지 다양한 ‘장애인정책’이 분명 존재하지만, 신청하고 심사를 받고 대상에 포함되지 않으면 없는 제도나 다름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국정과제로 대상자를 늘리겠다고 한 장애인연금이 대표적이다. 장애가 심한 장애인이면서 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인 경우 매달 일정액을 지급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지만, 당사자나 가족이 신청하지 않으면 국가는 결코 먼저 나서지 않는다. 한국장총의 장애인정책리포트-452호(장애인연금의 소득보전 효과, 당사자의 체감도는?)에 따르면 2024년 12월 기준 장애인연금 대상자 수는 약 49만 9천 명, 실제 수급자는 약 35만 1천 명이다. 이를 수급률로 계산하면, 약 70% 수준이며, 즉 전체 대상자 중 약 30%는 아직 수급신청을 하지 않았거나 신청을 했더라도 판정을 통과하지 못한 셈이다.

신청주의는 단순히 행정편의를 위한 방편의 문제가 아닌, 신청 과정 자체가 낙인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어왔다. 게다가 신청한 후 선별적 관료주의에 무장된 관공서에서 ‘얼마나 가난한지’, ‘얼마나 무력한지’를 증명해야 한다. 가난과 장애를 증명하는 순간, 스스로 사회적으로 더 낮은 위치에 서게 되고 관공서는 대상을 구분하는 힘을 갖게 된다. 많은 장애시민이 “나는 그렇게까지 손을 벌리고 싶지 않다”며 제도를 포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행정 절차는 또 다른 벽이다. 소득·재산 증빙, 병원 진단서, 주민등록상의 가족관계 확인서. 장애가 심한 장애인이 이 복잡한 여정을 홀로 감당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누군가 대신 서류를 챙기고, 이동을 돕고, 관공서의 눈치를 보며 협상해야만 문턱을 넘을 수 있다. 그 ‘누군가’가 없는 사람은 행정 절차 앞에서 다시 주저앉는다. 따지고 보면 이재명 대통령은 신청주의가 잔인하다고 했으나 실은 당사자 입증책임을 과도하게 지우는 선별적 관료주의가 문제의 본질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자동지급제가 답일까?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장애인연금과 같은 현금급여형 제도는 자동화가 가장 적합하다. 이미 데이터가 존재하고, 권리를 놓치는 이유가 대부분 ‘신청하지 못했기 때문’이므로 자동 지급은 사각지대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그러나 활동지원이나 보조기기 같은 서비스는 성격이 다르다. 사람마다 욕구가 다르고, 기기의 적합성도 다르다. 여기에 단순 자동화만 도입한다면 맞춤성은 희생되고, 행정 낭비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역은 ‘자동 알림+신청 지원’ 혹은 ‘자동 자격 통보+선택 신청’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보완할 수도 있다. 기본권리는 자동으로 열어주되, 세부 내용은 상담 등을 통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보완하는 방식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발굴주의다. 자동지급제도가 복지의 사각지대를 해결할 수는 없다. 데이터로 잡히지 않는 빈곤, 주소지만 남아 있는 가짜 가족관계, 생활의 세밀한 빈틈은 여전히 사람의 눈과 발걸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회복지사는 끊임없이 발품을 팔아야하고 국가는 지속적으로 발굴해야 한다.

해외에서는 자동지급제 또는 준자동지급제가 이미 오래 전부터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북유럽의 아동수당은 대표적이다. 출산 신고가 이뤄지면, 국가가 자동으로 지급한다. 부모가 따로 신청할 필요조차 없다. 아이를 낳는 순간, 국가는 부모의 신청을 기다리지 않고 권리를 건넨다. 영국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유니버설 크레딧(Universal Credit)’은 여러 복지 급여를 하나로 통합하고, 세무·고용 자료를 자동 연계해 매달 지급액을 산정한다. 신청 절차는 남아있지만, 이후에는 자동화 시스템이 소득 변화를 반영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데이터 오류로 과오지급이 발생하고, 이후 환수를 당한 가난한 이들이 오히려 빚더미에 앉는 사례가 속출했다는 거다. 자동지급제가 만능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다.

신청주의는 국민의 권리를 조건부로 만들었다. 신청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사람만이 국가의 지원을 받는 방식이다. 그러나 자동지급은 국가가 먼저 손을 내미는 방식이다. 북유럽의 아동수당처럼, 영국의 유니버설 크레딧처럼, 자동화는 권리를 실질화하는 강력한 도구다. 물론 오류의 부담이 상존하지만, 방향성만큼은 명확하다. 자동지급으로 가는 길은 단순히 행정 절차의 변화가 아니라 복지를 ‘찾아가는 권리’에서 ‘찾아주는 권리’로 바꾸는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어쨌든 이재명 대통령이 언급한 ‘자동지급제’로의 전환은 장애인정책의 전달체계의 새로운 전환의 시작이 될 텐데, 잔인한 신청주의를 벗어날 수 있을지 또 세부적인 정책 실천 과정에서 선별적 관료화를 어떻게 배제해 나갈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기사원문-더인디고(https://theindigo.co.kr/archives/63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