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근대역사박물관 전경–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 ©하석미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전경–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 ©하석미

광복절에 맞춰 떠난 시간 여행

얼마 전 광복절을 기념하며나는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걷는 여행길에 올랐다달력은 가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군산의 한낮은 여전히 뜨거운 햇살로 가득했다그러나 오래된 벽돌과 자갈길이 이어진 골목에 들어서자바람처럼 스며드는 시간의 그늘이 있었다.

과거의 아픔과 현재의 자유가 교차하는 이 길에서 잠시 멈춰 서니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더욱 깊게 숨 쉬게 하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에 내가 찾은 곳은 전라북도 군산항구 도시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아낸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멈춘 기찻길 위에 추억을 이어가는 경암동 철길마을이다이곳은 도심 속에서도 근대의 풍경을 생생히 마주할 수 있는 장소이자휠체어로도 함께 거닐 수 있는 무장애 여행지였다.

광복의 의미는 잊지 않고오늘의 삶 속에서 되새기는 것이라는 말을 떠올리며나는 군산의 시간을 향해 바퀴를 굴렸다.

박물관 안의 등대 – 군산항의 기억
박물관 안의 등대 – 군산항의 기억. ©하석미

웅장한 시작군산근대역사박물관

첫 도착지는 군산의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었다푸른빛 외벽과 붉은 벽돌이 조화를 이룬 건물은바다와 항구 도시의 풍경을 그대로 담아낸 듯했다입구 화단에 활짝 핀 꽃들은 무게감 속에서도 밝은 인상을 남겼다.

해망로에 자리한 이 박물관은 군산의 근대문화와 해양문화를 주제로국제무역항 군산의 과거·현재·미래를 한눈에 보여주는 공간이다단순히 전시를 보는 데 그치지 않고역사를 직접 체험할 수 있어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도 인기 있는 장소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왼편에 자리한 하얀 등대 모형이 시선을 끌었다군산항을 지키던 상징물이 실내 한복판에 서 있으니마치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듯했다선원들과 등대지기의 시선을 함께 공유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그 속에서 만난 시간의 무게

박물관 3층 전시실부터 관람을 시작했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오래된 인력거였다지금의 내 일상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지만한 세기 전 골목마다 이 작은 수레가 사람들의 발길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고 한다휠체어에 앉아 그것을 바라보니마치 서로 다른 시대의 두 바퀴가 잠시 마주한 듯한 묘한 감각이 스쳤다.

근대 거리 재현 속을 걷는 여행자. ©하석미
근대 거리 재현 속을 걷는 여행자. ©하석미

조금 더 나아가자 1930년대의 영동상가 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간판이 걸린 한약방가지런히 놓인 고무신나무로 된 계산대와 좁은 골목길… 휠체어 바퀴가 바닥을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동안나는 과거의 골목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아이들이 고무신을 직접 신어보고아버지가 작은 지게를 아이에게 메워주며 웃음을 나누는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지자이 전시가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살아 있는 일상의 체험임을 실감했다.

그러나 따뜻한 생활의 풍경을 지나자곧 쌀과 눈물의 역사가 나를 맞이했다. ‘군산이라 적힌 배 모형과 높이 쌓인 쌀 포대 앞에 서자책에서만 읽던 일제강점기의 수탈이 현실처럼 밀려왔다호남에서 거둬들인 곡식이 이 항구를 거쳐 일본으로 실려 갔다는 사실이차갑게 전해졌다옆에 설명된 부잔교(뜬다리)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었다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더 많은 쌀을 실어 나르려 만든 장치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눈앞의 전시물이 무겁게 내려앉으며 마음을 짓눌렀다.

하지만 박물관은 아픔에서 멈추지 않았다전시실 안쪽에서는 계몽운동과 3·1만세운동의 기록이 이어지고 있었다낡은 문서와 함께 전시된 인쇄 체험대에서는 아이들이 직접 독립신문을 찍어내고 있었다작은 손길에서 울려 나오는 ’ 소리는마치 그 시절 젊은이들이 외쳤던 자유의 목소리를 다시금 들려주는 듯했다.

옛 사진과 현대가 겹쳐진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포스터. ©하석미
옛 사진과 현대가 겹쳐진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포스터. ©하석미

마지막으로 마주한 것은 옛 기차역 매표소와 군산 시가지 모형이었다초록빛 창구 너머로 승차권을 내미는 역무원의 모습좁은 골목과 항구까지 세밀하게 재현된 모형은 과거의 일상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듯 다가왔다또 옛날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체험 공간도 있었다.

배경을 고르는 순간나는 마치 시간의 문을 열고 그 시대로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사진 속에 담긴 모습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잠시나마 과거를 살아본 듯한 특별한 경험이었다무엇보다도 그 사진은 메일로 받을 수 있어, 여행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꺼내보며 그날의 감정을 되살릴 수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천천히 둘러보는 동안 나는 역사의 아픔과 희망, 그리고 일상의 작은 온기가 모두 뒤섞인 군산의 시간’ 속에 깊이 잠겨 있었다맞은편에 전시장 입구에 적힌 천년 따라 구례 구비라는 문구를 지나자어둑한 전시실 안에서 빛과 그림이 살아 움직였다민요와 속담자손타령이 벽면을 타고 흘러나오며공동체의 지혜와 유머가 오랜 세월을 건너 지금 내 앞에 와 닿았다나는 그 소리에 잠시 발을 멈추고마치 그 시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2사람의 이야기를 만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내려갔다문이 열리자마자 공기가 달라졌다. 3층이 과거의 생활상을 재현한 무대였다면, 2층은 유리 진열장 속에는 알록달록한 노리개와 전통 의복어린아이의 작은 신발이 놓여 있었다분홍빛과 청색이 어우러진 장신구는 누군가의 바람과 사랑을 품은 듯 반짝였고작디작은 버선과 신발은 부모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그 앞에 서자오래전 누군가의 일상이 지금 내 눈앞에서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군산 3·5 독립만세운동과 생활사 전시. ©하석미
군산 3·5 독립만세운동과 생활사 전시. ©하석미

전시장 한가운데 펼쳐진 풍속화는 마치 병풍처럼 나를 감쌌다장터의 활기마을의 잔치아이들의 웃음이 그림 속에서 뛰쳐나오는 듯했고나는 그 속에서 오래전 사람들의 소리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역사의 무게 속에서도 꿋꿋하게 이어진 삶의 기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전시실 끝자락에는 벽 가득 메모지와 손글씨가 붙어 있었다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짧은 글귀 하나하나는 또 다른 전시 같았다. “행복했습니다.”, “역사를 잊지 않겠습니다.”와 같은 말들이 내 마음에 작은 울림을 주었다그 앞에 서 있던 나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었다.

내가 이곳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어진 공간에서 나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났다. 2층에는 계몽운동과 3·1만세운동의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다빛바랜 문서와 당시 사진그리고 그 속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흔적은이 도시가 단순히 쌀의 수탈지로만 머무른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군산은 억압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저항의 땅이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2층은 화려하거나 압도적인 규모의 전시가 아니었다하지만 그 속에는 사람의 삶과 희망그리고 작은 목소리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유물 하나글귀 하나가 지금 내 앞에 살아 있는 듯 말을 걸어왔고그것이야말로 역사를 전하는 힘이었다.

군산의 또 다른 현장들

바다를 지킨 군산의 배와 포. ©하석미
바다를 지킨 군산의 배와 포. ©하석미

엘리베이터를 내려 1층 해양물류역사관에 들어서자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영상이 먼저 나를 맞았다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군산이 걸어온 발자취가 시간의 흐름처럼 흘러갔다짧은 영상 속에서도 바닷바람과 항구의 분주한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고나는 어느새 긴 항해를 함께하는 승객이 된 기분이었다.

전시장 중앙에는 실물 크기의 고려 조운선이 자리하고 있었다곡식을 가득 싣고 강과 바다를 따라 오르내리던 배휠체어에 앉아 그 곁을 천천히 둘러보니단순한 전시물이 아니라 백성들의 땀과 삶이 실려 있던 움직이는 역사처럼 다가왔다아이들이 배 모형 곁을 뛰놀며 만지고 배우는 모습은과거의 시간을 다시 현재로 불러오는 듯했다.

군산 세관 본관, 붉은 벽돌 근대 건축의 상징. ©하석미
군산 세관 본관, 붉은 벽돌 근대 건축의 상징. ©하석미

밖으로 나오자군산의 역사를 품은 건물과 풍경이 이어졌다붉은 벽돌이 단단히 쌓인 구군산세관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안고 서 있었다독일인의 설계와 벨기에산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은마치 유럽의 어느 항구 도시를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오래전 세관 창구에 서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건물 안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길을 따라가면 시야가 탁 트이며 진포해양공원이 모습을 드러냈다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이라 불리는 진포대첩의 현장최무선 장군이 왜선 500여 척을 물리쳤던 역사가 이곳에 서려 있었다공원 안에는 대형 군함들이 전시되어 있었고손을 뻗으면 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질 것만 같았다군산 내항 쪽으로는 조수간만에 따라 높이가 조절되는 뜬다리가 놓여 있었는데물결 따라 오르내리는 다리를 바라보며이 도시가 늘 바다와 함께 숨 쉬어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경암동 철길마을추억을 걷다

군산 철길마을 추억의 문방구와 장난감 가게. ©하석미
군산 철길마을 추억의 문방구와 장난감 가게. ©하석미

박물관을 나와 3km 정도 달려 도착한 곳은 경암동 철길마을이었다골목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간 듯자갈길이 서걱이며 내 휠체어 바퀴 아래로 지나갔다울퉁불퉁한 길은 쉽지 않았지만그 불편함마저도 오래된 철길의 기억을 간직한 듯 다가왔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작은 가게들은 어린 시절의 골목을 그대로 불러냈다진열대 위에는 쫀득이어포불량식품 과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고나는 하나 둘 집어 들어 입에 물었다씹을수록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번지자어느새 나는 철없던 시절의 아이로 돌아가 있었다골목을 거닐며 동심으로 돌아간 순간세상이 잠시 맑고 단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햇살이 철길 위를 환히 비추던 낮 풍경은저녁이 되면 노란 불빛 속 작은 축제의 무대로 변한다고 했다좁은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가게 주인과 손님의 소박한 대화아이들 웃음소리가 어우러지며 마을은 살아 있는 무대가 되었다벽에는 옛 교복 사진과 만화 캐릭터 벽화가 걸려 있었고여행자들은 그 앞에서 추억을 남기듯 사진을 찍었다.

철길마을, 벽화와 추억의 풍경. ©하석미
철길마을, 벽화와 추억의 풍경. ©하석미
철길마을 벽화 앞의 여행자 미소. ©하석미
철길마을 벽화 앞의 여행자 미소. ©하석미

골목 끝 붉은 벽에 새겨진 *“I ♥ 군산”*이라는 글귀 앞에 서자마치 마을이 여행자에게 건네는 따뜻한 인사처럼 느껴졌다나는 그 순간군산의 시간이 단순히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새롭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을 마무리하며광복절을 되새기다

군산에서의 시간은 단순한 발걸음이 아니라역사를 따라 걷는 여정이었다박물관 속 쌀 포대와 부잔교 앞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아픈 현실이 뼈아프게 다가왔고, 2층 전시실에 남겨진 계몽운동과 3·1만세운동의 기록은 그 억압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희망의 불씨를 보여주었다.

경암동 철길마을에서 쫀득이와 어포를 입에 물고 잠시 동심으로 돌아갔던 순간조차도그 길 위에 쌓여 있는 기억들을 떠올리게 했다과거의 눈물과 오늘의 웃음이 겹쳐지는 자리에서 나는 자유와 평화가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다시 깨달았다.

광복절을 맞이해 찾은 군산은 나에게 분명히 말했다.잊지 말라그리고 오늘을 더 자유롭게 살아내라.”

여행의 끝자락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다짐했다내가 누리는 이 일상의 평온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그 고마움을 기억하며내일을 더 단단히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무장애 여행을 위한 접근성 정보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엘리베이터장애인 화장실 완비 휠체어 접근 원활

주소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로 240

운영시간: 09:00~18:00 (월요일 휴관)

입장료장애인 무료

문의: 063-454-7870

경암동 철길마을평탄한 구간 일부 가능자갈·침목 구간 이동 어려움

주소전라북도 군산시 경암동 일대

운영시간상시 개방 (가게별 운영 시간 상이)

입장료무료

화장실박물관·진포해양공원/철길마을주민센터 등 이용 가능

식당근대역사거리 주변 휠체어 접근 가능한 식당 다수

교통서울-무궁화호 기차 약 3시간 20분 소요 군산역 도착 후 전북 광역콜택시 이용(☎ 063 227 0002)


※기사원문-에이블뉴스(https://www.ablenews.co.kr/news/articleView.html? idxno=224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