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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인디고〕-안승준의 다름알기- 숨 쉴 구멍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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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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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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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상담가
동료상담가

[안승준의 다름알기] 숨 쉴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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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 홀 ⓒ픽사베이
▲포트 홀 ⓒ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임산부에겐 조심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지나치게 많이 움직이는 것도 조금 움직이는 것도 좋지 않다고 한다. 호르몬의 변화로 감정 기복이 생기지만 그마저도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라고 하고 무엇보다 먹지 말라는 것들이 셀 수 없이 많다.

회도, 술도 먹지 말고, 커피도, 녹차도 마시지 말라고 한다. 맵거나 짠 음식도 기름에 튀긴 음식도 조심해야 하고 출산 이후엔 찬물도 마음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한다. 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아서 열거하여 쓰지 못했을 뿐 ‘이건 괜찮겠지?’하고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못 먹고… 맘 놓고 먹을 수 있는 음식 찾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아내의 임신을 확인하고 내가 처음 한 일은 사용할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해서 관련 정보를 얻어내는 일이었는데 그 때문에 아내에게 가장 많이 건넨 말도 “이건 조심하라는데!” “이건 먹지 말라는데!” 같은 금기사항과 관련한 것들이었다.

처음 겪는 이런저런 불편함을 당황스럽게 맞이하는 사람에게 이건 안되고 저건 또 안되고 하는 말을 자제해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세 번 참고 한 번 말하고 다섯 번 인내하고 한 번 말하는데도 그 횟수가 적지 않았다. 아내가 인간으로 누려야 할 최소한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 주는 것과 태어날 아기의 위험 가능성을 줄이는 것 사이에서 적절한 내 위치를 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인지 그녀가 부단히 노력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이 엄마는 즐겨 마시던 커피도 찾지 않고 매콤한 음식, 자극적인 간식들도 잘 찾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잉태한 10달 동안 그리고 수유가 진행되는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산속 수도자들과 같은 식단으로 채워나가기는 쉬울 리 없었다. 때로는 라면 국물이 떠오르기도 하고 잘 먹지 않던 회가 먹고 싶기도 하고 이따금 시원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해 지기도 했다. 안쓰럽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어떤 판단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묵묵하게 견디는 짝의 곁에서 그저 지켜만 보던 어느 날 “한 모금쯤은 괜찮지 않을까?” 하며 커피를 권했다. “한 젓가락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며 라면도 건네보고 “신선하면 괜찮을 거야.” 하며 회도 한 점 주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는 아이에게도 그것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지만 그보다는 그냥 아내에게도 숨 쉴 구멍을 주고 싶었다.

조심해야 한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 정도의 이야기는 인터넷도 친구도 심지어 다른 가족들이 해 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나 마저 한 번 더 거들 필요는 없었다. 누구보다 아이의 건강을 가장 염려하는 사람은 뱃속에 아이를 품은 엄마였다. 내가 아무리 나쁜 음식을 권해도 그런 것들은 그녀가 먼저 먹지 않겠다는 결정을 할 것이었다.

다만 이 사람도 저 사람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투성이인 환경에서 “조금은 해도 괜찮지 않을까?” 말해주는 숨 쉴 구멍 정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음식을 몰래몰래 주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 정도라는 것이 겨우 혀에 대는 정도를 넘지도 못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허용하는 최대의 범위가 겨우 그 정도였다.

내가 아내에게 얼마나 시원한 숨구멍이 되어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는 건강하게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수유를 진행하는 지금도 나의 기본적인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을 숨도 못 쉴 정도로 꽉 막지는 말자는 쪽을 향한다. “조심하셔야 해요.” “하지 말아야 해요.”라고 말하는 역할을 맡은 이들은 주변에 많다. 그 와중에 내 역할은 “한 번쯤은 괜찮을 거야.” “너무 스트레스받을 필요는 없어.” 하는 쪽으로 정했다.

‘규칙을 지켜라!’ ‘옳은 길을 걸어라.’라고 알려주는 사람은 누구의 주변에도 많다. 그렇지만 세상 사는 게 언제나 그렇게 빡빡할 수는 없다. “한 번쯤 약간은 삐뚤어져도 괜찮아.”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라고 다른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것이 가장 그를 믿는 사람, 가장 가까운 이의 역할이다.

임산부는 이렇게 살아야 하고 장애인은 그렇게 살아야 하고 어른은 이런 규칙을 지켜야 하고… 매 순간 그렇게 살 필요는 없다. 완벽하고 지속적으로 틀린 판단이 아니라면 가까운 이에게 조금은 다른 길을 제안해 줘 보자! 우리에겐 숨 쉴 구멍도 필요하다.


※기사원문-더인디고(https://theindigo.co.kr/archives/58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