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알고 지내던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장애인콜택시를 이용하여 출근 중이었는데, 옆 차선에서 주행하던 차량이 무리하게 끼어들기를 시도하다, 장애인콜택시와 부딪힌 것이다.

불행 중 다행히도 트럭이나 버스와 같은 대형차와 부딪힌 것은 아니었으나, 좌석이 아닌 휠체어 전용 공간에 타고 있던 그는 사고 초기에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고, 상대 차량의 보험사로부터 접수번호를 받은 후 뒤 인근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병원에 도착해 초기 검사를 받아본 결과는 전치 4주, 골절이 없는 것을 감안한다면 제법 큰 부상이었지만, 환자의 상태가 입원을 해야 할 만큼 중하지 않다고 판단해 일주일 뒤에 MRI 감사만 잡아주면서 그는 다른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일주일 뒤에 촬영한 MRI 검사에서 허리 쪽에 이상은 없었지만 약 두 달 동안 치료를 받은 끝에 몸이 조금씩 회복되어 보험사 담당자와 합의를 시도하려고 할 때쯤, 부모님으로부터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을 들었다고 했다.

“보험사와의 합의는 부모가 대신 진행할 테니 보험사 담당자에게 전화가 오며 부모와 같이 통화하고, 합의 금액도 부모가 합의해서 보험사 직원을 바꿔줄 테니 그때 동의만 하면 된다”고 했다는 것.

교통사고 입원 환자가 받은 입원 생활 안내문. ©정현석
교통사고 입원 환자가 받은 입원 생활 안내문. ©정현석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족들의 결정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너는 장애가 있어서 이런 것(교통사고 처리와 같이 합의를 해야 하는 일)에 대해 경험이 부족하니 부모가 보험사와 이야기하는 것을 잘 듣고 배우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사고 피해자인 동생은 30대 후반으로 출근 중이었다. 다시 말해서, 휠체어를 탔지만 직장에서 장애를 감안하고 채용이 되었으며, 8년 가까이 무리 없이 회사생활을 할 만큼 판단력이나 문제 해결력 등이 비장애인의 그것과 비교해 봐도 전혀 떨어진다고 할 수 없는 친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에게는 그져 신경이 쓰이는 몸이 성치 않은 자식일 뿐이었다.

장애 정도는 다르더라도, 복지카드를 소지하고 다니며,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하는 내 입장에서도, 녀석의 부모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지면에 다 쓸 수는 없지만, 나 역시, 누가 물어보면 서너 가지는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녀석과 똑같은 걱정의 말을 듣고 살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1-2년 안으로 독립을 생각하는 마음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장애를 가진 자녀와 함께 살아온 부모님의 마음속에서 느끼는 자녀의 나이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는, 세상이 바라보는 나이는 그 간격이 커지면 커질수록 서로를 힘들게 할 것이 분명했다.

우리들의 부모님 세대에 삼십대 후반이라면 대다수가 학부모가 되어 있을 나이였다. 즉, 자녀에게 교통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자녀의 보호막이 되어 보험사와 이야기를 하고도 충분했을 것이며, 자녀를 돌보며 부모를 부양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장애와 결혼의 유무를 떠나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거기에 요구되는 사회인으로서 협상 방법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장애인콜택시가 오지 않아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다면, 사전에 전화하여 정중하게 사정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을 것이며, 교통사고가 처음이었다고는 해도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교통사고에 대해 공부하고 협상에 대해 공부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장애라는 이유로 묻히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고를 당한 동생이 보험사와 어떤 과정으로 협상을 하는지, 어떤 말로 자신의 의견을 어필하며 보험사와 밀고 당기기를 하는지 그의 부모님이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으면 좋겠다. 교통사고 시 보험사 담당자와의 합의 과정은 협상이며, 더 받으려는 피해자와 덜 주려는 보험사와의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이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몸 싸움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객관적인 증거로 보험사와 다툴 수 없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의 부모님이 그를 믿고 기다렸으면 좋겠다. 독립 후에는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더 많아질 것이고, 그때마다 부모님을 부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독립을 위한 준비 과정 중 하나는 부모와 함께하는 것 보다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을 늘리는 데 있으니 말이다. 녀석의 쾌유를 빈다.


※기사원문-에이블뉴스(https://www.ablenews.co.kr/news/articleView.html? idxno=215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