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요리사의 손으로 직접 면을 쳐서 만드는 수타 짜장면 가게에 오랜만에 방문했다. 기대했던 것처럼 쫄깃쫄깃한 면발은 기계에서 뽑아낸 다른 면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식감이 좋았다. ‘후루룩! 후루룩!’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도 전혀 불지 않은 면은 함께 식사한 일행 모두가 감탄사를 내뱉기에 충분했다.
어릴 적엔 짜장면을 참 좋아했다.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에 먹는 그것은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 만큼 기쁨과 설렘이 되었다. 그 조그만 몸으로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몫의 짜장면은 언제나 곱빼기였다. 그날 어머니께서 짜장면을 사주겠다고 하실 때도 난 이미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당연히 곱빼기를 주문하고 후루룩 한입 가득 면을 입에 넣는 순간 난 온몸으로 행복의 전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혀와 이로 면의 감촉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무언가 조금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나의 세포들을 휘감았다. 길쭉길쭉 반듯반듯해야 하는 면이 이상하게 울퉁불퉁했다. 입으로 느껴지는 식감도 전에 익숙하게 먹던 그것과는 너무 달랐다. 맛있어야 하는데 맛있지 않았다. 어른들은 “역시 수타가 다르긴 다르네.” 하셨지만 난 수타 짜장이라는 것은 내가 좋아하던 짜장면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짜장면의 면발은 길쭉길쭉 일정하게 뽑힌 기계면이어야 했고 식감도 지나치게 쫄깃쫄깃해서는 안 되었다. 한참 나이를 더 먹고 나서 수타 짜장면의 매력을 알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수타라고 적힌 중국집은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가서는 안 되는 가짜 짜장면 가게로 인식되었다.
생각해 보면 기계로 뽑은 것이든 손으로 직접 친 면이든 두 가지 면은 각각의 매력을 지닌 다른 면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수타가 더 맛있을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계로 뽑은 것이 더 맛있을 수 있다. 가격 때문인지 희소성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특정 종류가 모든 면에서 다른 종류보다 절대적으로 좋다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각자의 특성을 가진 서로 다른 면일 뿐이다.
아주 오래전 면 뽑는 기계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는 기계면이 특별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또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수타면이 희소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수타면이 귀하게 느껴질 뿐 어느 한쪽이 무조건 더 맛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연산 회가 양식 회보다 무조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도 영양학적으로는 꼭 맞는 말이 아니라는 연구를 본 적이 있다. 자연산 어종을 구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희소한 자연산 회의 식감이 더 맛있고 영양도 풍부한 것처럼 알려졌지만 일부 영양소의 경우 가두리 어장에서 양식된 양식어종이 낫다는 설명이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입맛과 영양 상태를 가진 것은 아니므로, 어떤 사람은 기계면 짜장면을 더 선호할 수 있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양식어종 회가 영양학적으로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단순히 가격이 비싸거나 희소하다는 이유로, 혹은 다수가 그렇다고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명확한 근거나 신중한 분석 없이 한쪽이 더 낫다고 맹목적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아침형 인간이 성공한다는 강연과 서적이 유행할 땐 모두가 일찍 일어나야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지만 우리 모두에겐 각자에게 맞는 생체 리듬이 있다. 성공하는 사람의 습관과 관련한 주장들도 이런저런 자료들로 돌아다니지만, 그런 방법론이 모두에게 적합하다거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들처럼 될 리도 없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가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계에서 뽑아낸 짜장면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에게 수타면이 좋은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해 보았자 그 아이가 갑자기 생각을 바꾸고 “수타면을 먹으니 더 행복하다.”고 말할 리도 없겠거니와 자연산 회를 좋아하는 이에게 사실은 양식 회가 더 좋은 것이라고 같은 가격에 사 먹으라고 한들 설득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각자가 다른 입맛을 가졌다면 각자의 기호대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 먹으면 된다. 보이지 않는 나의 삶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은 ‘눈만 보인다면 참 좋을 텐데!’라고 말하곤 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적어도 눈 보이는 자신의 삶이 보이지 않는 내 상태보다는 절대적으로 더 나은 삶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시각장애가 있는 내 삶은 시력 있는 다른 이들의 삶보다 모든 면에서 나쁜 상태에 있지 않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상태에 비해 다소 불편한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기계면이 수타면에 비해서 객관적으로 부족한 일부의 특성처럼 전체가 아닌 부분에 한하는 것이다. 기계면이 더 맛있어지는 유일한 방법이 수타면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내 삶이 더 나아지는 유일한 방법 또한 눈을 뜨는 것은 아니다.
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들은 너무도 고맙지만, 난 다른 이들과 조금 다른 방법이긴 하지만 자신의 삶을 나아지게 만드는 다른 방법들로 충분히 잘 살고 있다. 모두가 아침형 인간으로 살 수도 없고 모두에게 자연산 회를 권하는 것이 최고의 대접이 아닌 것처럼 비장애인의 삶을 바라는 것이 내게 가장 감사한 인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기사원문-더인디고(https://theindigo.co.kr/archives/62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