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좋은 기회로 KBS 인간극장에 출연하게 되었다. 나와 내 주변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줘야 한다는 점과 긴 촬영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출연 결정을 여러 번 망설였지만, “삶에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아내의 격려와 이해 덕분에 결국 출연을 결정하게 되었다.
상상했던 것처럼 우리 집과 회사에 고정카메라를 설치하는 방식은 아니었고, 생각보다 피디님이 카메라를 켜는 시간도 많지 않았다. 과장되거나 연출된 장면을 강요하는 일도 없어서 예상보다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촬영이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출근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퇴근하고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피디님이 함께 계시는 것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순간순간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행동하다 보니 시력이 좋지 않은 내가 카메라를 의식하는 시력 좋은 다른 이보다 유리했던 것 같다.
내가 지나는 모든 장면에는 교과서의 단원 정리처럼 짧은 질문들이 따라붙었다.
“아내와의 결혼을 결정하게 된 시간에 대해 말해주세요.”
“햇살이를 안고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드셔요?”
“수학을 가르친다는 건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이러한 질문들은 오래도록 생각하지 않았던 장애와 관련된 불편함으로까지 이어졌다.
“처음 보이지 않았을 때는 어떠셨어요?”
“지금처럼 밝게 사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잘 살고 계시지만 혼자 다니고 아이도 보고 결혼생활도 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으시지요?”
어린 시절 나의 이야기부터 처가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질문들은 내게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잊고 있던 감사함이 떠올랐고, 의미 없이 반복되던 움직임에 다시금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아내를 향한 마음도, 어머니에 대한 감사도, 장모님의 마음 아픔까지도 다시금 꺼내어 깊이 생각하고 되돌아보았다.
촬영이 이어지는 하루하루는 체력적으로는 분명 피곤했지만, 내게는 반성의 시간이었고 때로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수십 년 다큐멘터리를 찍어온 피디님은 큰 강요나 지시를 하지 않았지만,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내 생각과 감정을 끄집어내었다.
예고편이 올라오고 홈페이지에 시놉시스가 게시되었을 때, ‘내가 이렇게까지 다 말해도 되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마흔을 넘긴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떤지 나조차도 궁금해졌다.
5일간의 이야기는 온전히 내가 주인공이 된 한 편의 드라마일 것이다. 가족과 지인들이 함께 등장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영화 속 조연이나 단역처럼 나 중심의 시선에서 비춰질 것이다.
오히려 내 걱정은 이 부분에서 시작된다. 나의 육아는 모든 것을 전담하는 슈퍼맨 남편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나보다 더 많은 역할을 감당하는 아내가 있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은 장애인 사위를 반대했던 모진 어른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내면에는 누구보다 딸을 사랑하는 아픈 마음이 있다. 내가 수학을 사랑하고 학생들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의 주변인으로 출연할 선배 선생님들은 나보다 몇 배는 더 훌륭하신 분들이다.
배트맨 영화에서 조커의 내면을 깊이 다루지 못하고, 춘향전에서 방자는 단지 도련님의 일을 돕는 역할이었지만, 그들이 주인공이 된 다른 시점의 작품에서 우리는 비로소 보지 못하고 놓쳤던 진실들을 깨닫게 된다. 아내도, 어머니도, 장모님도, 동료 선생님들도, 심지어 출근길에 스쳐가는 사람들조차도 모두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다만 2시간 남짓한 짧은 영상에서는 그들 중심의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했을 뿐이다.
“장애 가진 남편과 사는 건 어떤가요?”
“아들은 자라면서 말썽을 부리진 않았나요?”
“사위에게 더 바라는 점은 없을까요?”
이런 질문들이 중심이 되었다면, 영상의 방향과 시청자의 판단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내 중심적으로 돌아가는 카메라 앵글 속에서 어떤 이들은 사실보다 작게, 또 다른 이들은 사실과 다르게 묘사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단지 내 시점에서 해석된 영상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공인 이 영상 속에서, 내가 놓치고 살았던 것들이 보였으면 좋겠다. 나 중심으로 그려진 그림들 속에서도, 화면에 담기지 못한 수고의 손길들이 보였으면 좋겠다. 적어도 ‘인간극장’은 그렇게 보이면 좋겠다.
※기사원문-더인디고(https://theindigo.co.kr/archives/619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