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인디고=전윤선 집필위원] 가을 어수선함은 사라지고 마음속엔 고요함만 남길 바랐다. 그래서 고요한 곳을 찾아 나섰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느닷없이 떠날 자유가 있지만 아직은 별안간 떠날 여건은 안 되는 환경 천지다. 그럼에도 떠날 수 있기에 계절의 끝을 잡으려 바다를 건넜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녘은 주홍빛으로 가득하다. 자연이 내어준 양분과 농부의 수고가 더해 제주감귤은 실하게 여물었다. 들판도 억새가 한창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은빛 억새가 햇살에 아른거리고 바람이 이끄는 대로 춤사위가 부드럽다. 발길이 이어진 곳은 새별오름이다. 새별오름 억새밭 사이로 사람들의 행복한 비명이 바람과 어우러져 왁자지껄하다.
새별오름이 무장애 여행지로 사랑받는 건 ‘제주당’ 카페가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주차장은 물론이고 2층 건물에 승강기가 있어 층간 이동이 가능하다. 카페 안에서 휠체어 탄 손님도 쉽게 움직일 수 있고 테이블마다 접근할 수 있어 음료와 식사도 가능하다. 접근성이 좋아서인지, 휠체어 탄 여행객이 자주 찾고 빵지 순례지로도 입소문 타면서 줄서기는 기본이다. 그럼에도 휠체어 탄 손님에게는 테이블까지 음료를 가져다주는 서비스도 제공된다. 갓 구워낸 빵을 고르고 음료를 주문해 야외 테이블에서 여유롭게 먹는다.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건 카페 안에 장애인 화장실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의 식음료 시설 중 장애인 화장실이 있는 곳은 딱 두 곳밖에 못 봤다. 중문 쪽에 있는 덤장 식당과 새별오름 앞 ‘제주당’ 카페다. 먹고 싸고 자는 건 원초적 본능이지만 야외 활동할 때는 장애인 화장실 없는 곳이 많아 음료나 음식을 격하게 자제하게 된다. 하지만 새별오름에서는 그런 걱정 없이 마음 것 먹을 수 있다. 이젠 전국의 식음료 시설에도 장애인 화장실이 보편화되어야 한다. 마음껏 먹고 마시며 쌀 수 있는 권리, 늘 장애인의 요구사항이지만 현실은 요원하다. 지금의 편의증진법은 불편증진법과 유사하다. 언제쯤 원초적 본능의 권리가 보장될까. 그러기 위해서는 편의증진법 전면 개정이 필요하다.
제주당에서 당 충전하고 카페 마당으로 나갔다. 새별오름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억새밭이 지평선 어디 쯤인지 보이질 않을 정도다. 하늘을 향해 웃음 짓고 있는 조형물도 있다. 조형물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다. 일행 중 일부는 휠체어에서 내려 소녀와 나란히 앉았다. 조형물과 똑같은 포즈를 하고 사진 속에 추억을 박제했다. 남는 건 사진뿐이다.
억새밭 사이로 데크길을 따라 가다보면 초록 밭이 펼쳐진다. 어린 유채꽃은 초록 세상을 열고 키 큰 억새는 은빛 세상을 열어 서로 다른 세상을 조화롭게 연출한다. 데크길을 따라 가다보면 새별오름과도 마주한다. 그 길 끝에서 억새의 향연이 드라마처럼 펼쳐져 가을의 절정을 노래한다. 그래! 이 풍경을 보러 여기까지 왔지. 새별오름 억새는 능선을 따라 하얀 물결처럼 일렁인다. 오름 능선을 따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간다. 그들이 점처럼 작아질 무렵 주변은 고요해지면서 공허함이 밀려온다. 공연이 끝난 텅 빈 공연장처럼. 길을 잃은 고양이처럼 공허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상황이 지연된다고 실패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 안식처에 가는 시간처럼 사람마다 자신만의 속도가 있고 속도를 내어 가다가도 숨이 찰 때 쉬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 방법은 제각각이지만 내겐 여행이 정서적 쉼이다. 어느새 저녁 해는 부지런히 새별오름 뒤로 숨고 있다.
예약해 둔 다인승 장콜이 출발한다는 연락에 서둘렀다. 다인승 차량은 전동휠체어 탄 승객 3명이 승차할 수 있다. 목적지는 올레10코스 구간 중 송악산이다. 휠체어 올레길이 처음 생긴 곳도 송악산과 산방산 사이 사계해변 구간이다. 경치도 아름답고 맛있는 여행지로도 좋지만 장애인 화장실이 없는 것이 흠이었다. 송악산 주변 접근성 좋은 식당이 몇 곳 있지만 먹는 시늉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송악산 주차장에 내려 주변을 둘러보니 장애인 화장실이 새로 생겼다. 어찌나 반갑던지 서둘러 화장실로 갔다. 그런데 장애인 화장실 칸 문이 잠겨 있다. 관리자에게 연락해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곧이어 관리자가 나타나 문을 열면서 물 내림 버튼이 고장 났다고 한다. 올 삼월에 생긴 화장실인데 장애인은 처음이라며 수통 뚜껑을 열고 레버를 위로 잡아당기면 물이 내려간다고 일러준다. 이런 상황은 송악산을 둘러보고 내려와서도 반복됐다. 장애인 화장실 칸 문은 잠겨 있었고 관리자는 전화해도 오질 않아 주변에 나뭇가지를 주어와 잠김 버튼을 겨우 열고 사용했다. 아마도 화장실 관리가 귀찮아 일부러 잠가 놓는 것 같은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급하게 볼일을 해결하고 나오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마음은 평온해졌고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바람은 몹시 불고 파도는 높게 일렁인다. 풍경에 잠시 빠져들고 있다가 주변 식당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전에 있던 문턱 없는 식당은 모두 사라지고 죄다 계단뿐인 식당으로 바뀌었다. 예나 지금이나 송악산 근처에서는 밥 먹긴 틀렸구나 싶다. 할 수 없이 야외 테이블 있는 식당으로 갔다. 테이블과 의자는 일체형 이어서 휠체어에서 내릴 수 있는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서 먹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릎 위에 쟁반을 올려놓고 먹기로 했다. 음식 주문을 받으러 주인장이 나와 식당 뒷문은 턱이 없다며 들어오라고 한다. 잘됐다 싶어 얼른 뒷문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려고 의자를 빼달라고 하니 주인장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다른 손님은 받지 말라는 건가 하면서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못 들은 척하고 상한 기분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테이블 바닥에 있은 화분을 뒤쪽으로 조금만 옮겨달라고 했다. 화분까지 옮겨달라고 해선지 또다시 다른 손님은 받지 말라는 거냐며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참다못해 나도 폭발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뒷문 얘길 하지 말던가 소리쳤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다. 그렇게 귀찮으면 처음부터 받지 말아야 했지 않냐고 큰소리를 냈다. 뒷문으로 들어오라 해놓고 짜증을 내면 어쩌란 거냐며 식당을 박차고 나왔다.
열을 식힐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바로 옆 식당은 계단 서너 개여서 포기하려는데 측면으로는 10센티가량의 턱이 보였다. 이 정도는 휠체어 뒤를 살짝 들어주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어 그 식당으로 갔다. 식당 안은 넓고 사장님도 엄청 친절하게 응대한다. 덕분에 언짢았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메뉴도 간결했다. 보말 죽과 보말 칼국수뿐이다. 둘 다 주문하고 조금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송악산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식당이지만 맛 좋고 양도 많은데다 친절까지 더해 손님 대접 받는 ‘형제섬 보말 칼국수’ 식당. 배가 불러서인지 마음도 다시 넉넉해졌다. 언제쯤 눈치 안 보고 손님 대접 받을 수 있을까.
송악산 산책로를 따로 전망대까지 가기로 했다. 주차장에서 송악산으로 가는 계단 3개도 사라졌다. 완만한 경사 길을 걸으며 고개를 돌리니 사계해변이 반짝반짝 빛난다. 저 멀리엔 산방산이 웃고 있고 걷다 서기를 반복하며 그림 같은 풍경을 카메라 속에 밀어 넣었다. 곧이어 송악산 전망대에 이르렀다. 전망대에서는 가파도와 마라도가 가까이에서 보인다. 빈대떡처럼 넓게 퍼진 섬은 가파도이고 절벽이 보이는 작은 섬은 마라도이다. 가파도는 청보리 축제로 유명한 곳이지만 휠체어 탄 사람은 닿을 수 없는 섬이다. 가파도행 선박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렵고 가파도 접안시설 접근성도 엉망이다. 여객선 접안시설만 조금 개선하면 평지인 가파도는 휠체어 탄 여행객도 갈 수 있는 섬이다. 제주여행 때마다 가파도에 가고 싶었다. 청보리가 넘실대는 봄이면 더 가보고 싶은 섬이다. 물리적 장벽으로 갈 수 없는 아쉬움은 가슴속 한편에 돌덩이처럼 짓누른다.
제주도청에 수없이 민원 제기하고 토론회 등 기회 있을 때마다 문제 제기했지만 변화는 없다. 다만 가파도행 여객선 터미널에서는 휠체어 탄 여행객에게 접근성 엉망인 접안시설을 보여줄 뿐 개선한다는 어떠한 제스처도 없다. 혹시나 해 국가인권위에 차별 진정했지만 역시나 기각됐다. 휠체어 타고 여행하다 보면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 참 많다. 조금만 신경 쓰면 닿을 수 있는 곳도 인식의 결핍으로 곳곳에서 제외된다. 빛나지 않는 별은 차별이고, 벌레 중에 가장 나쁜 해충은 대충이다. 가파도 접안시설은 휠체어를 탄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대충 만든 것 같다. 언제쯤 바닷길이 열려 가파도 풍경 속에 녹아들 수 있을까. 기다림이 무한정의 시간이 아니길 바라본다. 세상 모든 기다림엔 그리움의 무게가 있다.
두려울 게 없던 시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여행길을 나선다. 나이 먹는 즐거움도 음식 먹는 기쁨도 다 누려봐야 삶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누군가 귀띔해 줬다. 미루고 안 하다가는 똥 된다면서.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길 위에서 방향을 다시 설정해 시작할 수 있었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간은 구름과 바람이 서로 비켜주면서 바다는 다시 별빛으로 하루를 재부팅한다. 잔잔한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그 섬에 가고 싶다.
무장애 여행 팁
- 코스: 새별오름 → 송악산
- 교통: 제주특별자치도 교통약자이동지원센터(즉시콜: 1899-6884, 문자접수: 010-6641-6884)
- 숙박: 하이제주호텔(콘도형)(무장애 객실내:방 3개, 전화: 064-796-8000,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일주서로 5125, 홈피: https://hijejuhotel.com/)
- 무장애 여행정보: 제주관광약자접근성안내센터(전화: 1566-4669, 홈피: https://easyjeju.net/index.php), 두리함께 여행사(장애인전문여행사, 전화: 064-742-0078, 홈피: www.jejudoori.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