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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인디고]-안승준의 다름알기-보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비결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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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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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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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상담가
동료상담가

[안승준의 다름알기]보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비결

▲밤하늘의 별들이 연결되어 별자리를 이루는 모습 /이미지=챗gpt
▲밤하늘의 별들이 연결되어 별자리를 이루는 모습 /이미지=챗gpt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이런저런 연수에 참가하다 보면 강사들은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일반적으로 참가자들의 마음을 열거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활동들이다. 몸풀기 체조를 하기도 하고 크게 웃어보라고도 한다. 재미있는 난센스 퀴즈를 풀 때도 있다. 이번엔 종이와 펜을 나눠주는 것으로 보아 내게 조금 어려운 과제가 되리라 추측했다. 이런 경우 난 강사의 마음을 괜스레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척을 하거나 얼른 주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료를 찾곤 한다.

“여섯 분 정도씩 둘러앉으시고 본인의 왼쪽에 있는 분의 얼굴을 1분 동안 그려주세요.”

이번엔 어떤 뾰족한 방법을 찾기가 힘든 과제가 주어졌다. 그리는 척을 할 수는 있었지만, 대상이 정해진 사람의 얼굴을 그린다는 것은 흉내 내기도 쉽지 않았고 제한된 시간이 짧았으므로 다른 분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곤란했다.

한쪽 귀퉁이에 이름을 적으라는 지시에만 겨우 응답하고 팬과 종이를 어정쩡하게 든 채로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누군가의 얼굴을 그리기에 2분은 아주 짧은 시간일 수 있지만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눈치 보며 기다리기엔 꽤 긴 시간이기도 했다.

“많이 그리셨나요? 완성되지 않았다고 걱정하지 마시고 오른쪽에 있는 분에게 종이를 넘겨주세요. 계속 이어서 그림을 완성해 가시면 됩니다.”

2분이 한 번 더 지난 뒤에 강사님은 같은 지시를 한 번 더 말씀하셨고 총 다섯 번 종이가 오른쪽으로 넘겨진 10분의 시간 동안 나를 포함한 우리가 그려낸 그림은 그 종이 속 주인공에게 도착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종이를 오른쪽 분에게 넘겨주는 처음 순간엔 미안함과 민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넘기고 받으면서 나의 부족함은 조금씩 가려지고 희미해져 갔다. 두 사람이 그리고 세 사람이 그린 그림에서 한 사람의 부재는 나 혼자 보낸 1분보다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

각자가 받아 든 자기 얼굴을 감상할 때 “한 사람만 더 그렸으면 더 완벽했을 텐데!”라고 말하는 이도 없었고 내 그림을 설명해 주는 동료들 덕분에 난 강사님이 의도한 대로 강의 전 사전 활동으로 얻을 수 있는 마음 열기에 성공했다.

시각장애를 가지고 살다 보면 때때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만나게 된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그렇지만 집안일할 때도 아이를 키울 때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종종 그럴 때가 있다.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줄 때 내용물이 흘러내릴 때가 있는데 난 그 변의 흔적을 찾지도, 깨끗하게 정리하지도 못한다. 낯선 장소에 현장 체험을 나갈 때 난 우리 반 학생들을 안전하게 이동시켜 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고 학생들을 인솔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그림을 함께 채워주는 가족과 동료가 있기 때문이다. 난 실제로 하지 못하는 것이 있고 많이 불편할 때가 있지만 그 부분은 가족과 동료들이 덮어주고 가려준다.

생각해 보면 학교에 다닐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나의 장애가 내게 큰 두려움이나 걱정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은 내 곁에 있는 크고 작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내가 눈이 보이던 그때에도 그랬고, 나의 그림을 채워주는 이들도 다른 장면에서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랬을 것이다.

장애가 있는 나 또한 어떠한 순간에 다른 이들의 그림을 채워줄 때가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짐을 들어주고 시간을 대신 채워줄 때 나 또한 그의 빈 그림을 채워주려고 노력한다.

요즘 햇살이 덕분에 새로운 관계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들의 선생님을 만나고 친구 부모님과도 교류한다. 아기 옷을 판매하고 키즈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과도 대화하고 햇살이를 귀여워하는 동네 할머니와도 인사한다.

진짜 아빠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내가 그리지 못하는 내 그림을 채워주고 있고 미약하지만 나 또한 그들의 그림에 작은 점을 더하기 위해 노력한다. 혼자서 뭐든지 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의 연수 활동이 그랬듯 생각보다 많은 이들은 관계 안에서 나의 부분을 티 나지 않게 채워준다.

관계의 힘을 믿는다면 우리의 막연한 두려움도 자신감으로 변할 수 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혼자서 뭐든 잘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보다 관계를 소중히 가꾸는 것일 수 있다.


※기사원문-더인디고(https://theindigo.co.kr/archives/64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