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스페셜올림픽 코리아 미술 공모전 '대상 수상작 양예준 작가의 [ 나를 안아주는 우리엄마 2021.08] . ©장윤경](https://cdn.ablenews.co.kr/news/photo/202510/225080_122411_2343.jpg)
【에이블뉴스 장윤경 칼럼니스트】어쩌면 하늘의 뜻이었을까?
‘그림 엄마’ 커뮤니티에 아들의 작품 하나를 처음 올리며 입문하던 날, 언젠가 시간이 흘러 내가 이곳에 대표 엄마 중 한 사람이 될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그림 엄마’에 아들 작품 하나를 올려놓고, 온종일 작품 조회 수와 댓글 반응이 궁금해 내 눈은 휴대전화 속으로 빠져들 지경이었다. 급기야 오후가 되자 ‘걱정’이란 이름이 머릿속에 찾아와 ‘후회’라는 이름표로 바꿔 달며 다크 서클까지 만들기 시작했다.
그날 밤.
놀랍게도 제일 먼저 응원의 첫 댓글자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운영자 한젬마 감독! 그녀의 환영 댓글을 시작으로 장애 작가 엄마들이 작품에 대한 짧은 감상평과 응원의 선플 메시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오는 게 아닌가?’ 그저 보고 있는데도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미술이라는 같은 재능을 가진 장애 작가들과 비장애 미술 영재들이 함께하는 온라인 공간! 그들의 부모들이 서로 시기 질투가 아닌, 응원과 격려로 하나 되는 이 힘의 원동력은 도대체 뭘까? 전국의 많은 발달 장애, 미술 영재 부모들이 미술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통하면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도 교육비나 회비도 없이 선의의 경쟁과 나눔을 할 수 있다? 이게 가능하다고?
‘예술’이라는 힘은 ‘장애’라는 편견도 없이, 말하지 않아도 말한 것처럼, 보지 않고도 본 것처럼 그야말로 ‘이해와 사랑’ 그 너머로 하나 되게 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옳았다. 나는 아들을 키우며 마음에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그림 엄마’ 카페를 찾아 쉼표를 그리고 있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초등 4학년 여름.
아들의 같은 반 남자아이가 급식실에서 뒤로 가라며, 줄 서 있는 예준이만 유독 괴롭힘이 반복된다는 소식에 나의 불안함은 결국 학교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 시큰둥 한 담임의 목소리가 나의 불안과 관심지도 부탁을 그저 무안하게 할 뿐이었다.
‘엄마! 엄마! 우리 반 애가 나 여기를 쳤어요! 엄마! 엄마! 많이 아파요.’
하교 시간 교문 앞, 멀리서 예준이가 통곡하듯 울어대며 마치 소변이 마려운 아이처럼 바지를 부여잡고 나를 다급히 부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 순간! 코로나로 교내 외부인 출입금지 표지판이고 뭐고, 이미 내 몸은 아들을 향해 교내로 뛰어들고 있었다.
‘엄마, 집에 가려고 신발 갈아신는데…….’ 숨이 넘어갈 듯 꺼이꺼이 우는 소리에 아들의 뒷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마침 옆에 있던 한 여자아이가 증인이 되어 예준이의 통역을 도왔다.
“아줌마, 저기 서 있는 우리 반 남자애가요, 예준이가 가만히 서 있는데 신발 주머니 돌리면서 갑자기 때리고 간 거예요. 저 애, 우리 반 애들한테 다 시비 걸고 다녀서 만날 선생님께 혼나는 아이예요!”
고개를 돌려 보니 내 눈앞에 그 아이가 예준이의 급소를 치고도 아무렇지 않게 1층을 배회하고 있는 게 아닌가?
바로 그때, 나를 아줌마를 넘어 조폭 마누라로 변신시켜준 용기는 다름 아닌 사춘기보다 무서운 손님 갱년기였다.
‘야! 너 이리와. 내가 예준이 엄마인 거 알지? 왜 가만히 있는 우리 예준이 이유 없이 때려! 그것도 급소를! 어디서 너보다 약한 사람한테 이런 행동 해! 한 번만 더 예준이 건들고 이런 행동 했다가는 아줌마가 너, 가만 안 둬! 너 지금 당장 부모님께 전화해서 오시라고 해! 경찰 불러서 이 학교 못 다니게 할 테니까!’
그 순간 내가 배워온 윤리 도덕, 육아 전문가 혹은 정신과 의사에게 들어본 자녀 교육이론이고 뭐고 오로지 아들에게 이 험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생존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초등학생을 상대로 협박하는 비겁한 어른일 뿐이었다. 사과(?)를 받는 형식 따위도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엄마들 같으면 ‘같은 반 친구끼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지 이러면 되겠니?’라고 우아한 목소리로 조용히 타일렀을까? 그러나 나는 아들 손에 신발 주머니를 쥐여 주며 이렇게 말했다.
‘예준아! 너도 똑같이 때려! 왜 맞고만 다녀 어!’
그러나 나의 왈가닥 DNA를 조금도 물려받지 않은 순한 아들은 그저 때릴 줄도 모르고 상대를 향해 울먹이다가 상대 팔꿈치를 약하게 미는 시늉이 전부였다. 상대 아이는 여전히 반성의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내 우렁찬 목소리는 교내 하굣길 학생들이며 교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고, 결국 4층에서 이 소식을 듣고 담임 교사가 내려왔다. 그래도 내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 결국, 제가 우려했던 일이 터졌네요. 분명히 제가 관심지도 전화로 부탁드렸던 것 같은데 이게 뭐죠? 학교는 특수교육 대상자를 더 보호 관찰해주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마스크를 내 던진 나의 목청은 예준이 뒤에 엄마인 내가 있으니 함부로 말라는 담임과 학생들을 향한 울분의 소리였다.
그날을 기점으로 담임도 긴장한 목소리로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
![제18회 세계 어린이 민화 그리기 공모전 대상 수상작 - 양예준 작가의 [코로나를 물리친 무지개 호랑이2021.10] . ©장윤경](https://cdn.ablenews.co.kr/news/photo/202510/225080_122410_1831.jpg)
예준이를 지속해서 괴롭히던 아이는 조부모 손에 자라 부모소환도 어려운 데다, 이미 다른 아이들과도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켜 학사 경고까지 받은 아이라 소개했고, 학교폭력으로 내가 회의를 신청한다 해도 현재 코로나로 언제 회의가 가능할지는 알 수 없다 했다. 담임이 왜 내 민원전화에도 시큰둥한 목소리였는지 스스로 해설까지 해주는 대목이었다. 그 말을 뒤로 담임은 코로나를 핑계로 두 아이를 교실에 데려가 예준이에게 사과하도록 지도했다며, 이 사건을 교실 전화로 대충 통보 후, 아들을 돌려보내는 게 전부였다. 그야말로 코로나는 마치 윤리 도덕, 사마리아 법도 예외로 만들 수 있고, 부모와 대면을 안 해도 정당한 이상한 나라의 면죄부가 되어있었다.
‘이봐! 총각 선생! 당신도 이 담에 장가가면 아버지 될 텐데! 장애 학생 부모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게 힘들지 헤아려 주지는 못할망정 일 처리를 이따위로 마무리해? 담임 교사란 사람이 이래도 되는 거야? 발달 장애 아이가 얼마나 자기 의사 표현을 한다고, 부모 보는 데서 보란 듯이 사과를 시키고 잘잘못을 가르쳐야지 이게 교사가 할 자세야? 이 담에 천벌 받아 이 양반아!’ 화가 치밀어 오르고 눈물이 났지만 결국 학교를 안 보낼 게 아니었기에 나 역시, 통화가 끝난 전화기를 향한 혼잣말이 전부였다.
“예준아, 아까 왜 그 친구를 못 때렸어.”
“내가 때리면 친구가 여기가 아프고, 나한테 사과했으니까.”
아들과의 하굣길, 아들의 대답은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는 나를 그저 부끄럽게 했다.
똑같이 상대에게 복수하는 것이 내 정신건강과 삶에 다 부질없다는 것, 그리고 신앙인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용서’의 자세가 무엇인지, 가르침을 주는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내 뱃속에서 어떻게 이런 천사가 왔을까 싶을 만큼, 예준이는 내 삶 스승이요, 하늘이 보내준 천사였다.
내 주변의 장애 아이 엄마들은 언니 요즘 애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나중에 중, 고등학교 때 혹시라도 다시만나 2차가해 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겁을 줬냐며, 나와 아들의 몇 년 후를 걱정했지만 절대 후회는 없었다.
집에 돌아와 세수로 놀란 마음을 닦아 보는데도, 막상 내 안의 욕심과 설움은 닦이지 못한 채 수건에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거울 속 벌게진 내 눈을 보며 주문을 외웠다.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 몇 번 기도를 올리는 밤. 꼭 그런 날은 밤마다 ‘그림 엄마’를 찾아가 댓글로 마음의 쉼표를 그리며 나도 응원 이어달리기를 했다. 알 수 없는 힘이었다.
‘그림 엄마’는 마치 친정엄마 품에 찾아가 하염없이 울고있어도, ‘괜찮아 윤경아! 예준이도 너도 지금 잘 하고 있어! 예준이도 이렇게 좋아하는 미술이라는 게 있으니 세상 앞에 두려워 마!’라고 말없이 안아주는 2번째 친정엄마 품이 되어갔고, 그들의 응원 댓글이 나를 안아주고 때론 내일을 살아가게 했다.
나는 예준이의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지만, 나도 아직은 엄마가 필요한 철부지 소녀였다. 그러나 내 현실은 이제 곧 80살을 바라보는 내 친정엄마의 엄마가 되어줘야만 하는 반백 살의 내 나이가 그저 부끄럽고 아쉬울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 날밤 또 한 번 단단한 예준이 엄마가 되어갔다.
※기사원문-에이블뉴스(https://www.ablenews.co.kr/news/articleView.html? idxno=225080)
